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문단 편집) === [[한반도]] === ##대한민국은 이때 존재하지 않았음으로 문단명은 "한반도"로 유지해주시길 바랍니다. 당시의 1차 사료나 해방 직후의 반응을 보면 전시에 해외의 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식민지의 한국인들은 대부분 ''''뭔가 엄청나게 대단한 폭탄이 일본 본토에 떨어졌다'''' 정도로 알고 있었다. 일본 현지에서조차 정보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식민지 조선에 상세한 정보가 전달되었을 리가 만무하고, 소수의 지식인을 제외한 대중들은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어리둥절한 상황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대중이 전말을 알게 된 것은 [[8.15 광복]] 이후였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감상이 드러나 있는데, 광복 이후 한국의 지식인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이 한국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부국강병뿐만 아니라 국가의 독립에 있어서도 과학 기술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했으며, 과학 기술에 관한 도구주의적 인식이 강화되었다고 서술했다. 김구는 원자폭탄 투하 이전에도 막내 아들 [[김신]][* 대한민국 공군 창설 멤버이자 제6대 공군참모총장으로, 김신의 [[6.25 전쟁|6.25]] 시절 복무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가 [[빨간 마후라(영화)|빨간 마후라]]다.]에게 [[제공권|'미래의 전쟁은 항공력이 좌우한다']]는 말을 했을 만큼 전쟁에 있어 과학 기술의 영향력을 높게 평가했는데, 이런 김구의 사상이 훗날 김구의 후손들이 [[공군]] 장교로 병역 의무를 이행하는 전통이 생긴 데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조병옥]]의 경우는 일제의 탄압으로 시골에 요양을 살았던 1942년에 이미 미국에서 원폭을 개발해서 떨어뜨릴 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몰래 알려주었다고 회고록에 적었으나 이건 그가 회고록에 거짓말을 쓴 것이다. 원폭 개발은 당시 미국에서도 초극비 프로젝트였다. 에놀라 게이 탑승원들조차 히로시마로 출격하는 B-29 기내에서 '원자폭탄'이라는 명칭을 처음 들었을 정도의 극비 작전인데 조선의 시골 마을에 살던 조병옥이 원자폭탄 계획을 무슨 수로 알았겠는가. [[해리 S. 트루먼]]은 [[미국 부통령|부통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서거로 부랴부랴 대통령에 취임할 때까지 원폭 개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원래 회고록이라는 게 그 특성상 과장과 윤색이 많으니 적당히 걸러서 받아들여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